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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발병

[비망록] 만원버스 안에서 공황장애 겪은 썰

by 후니훈 - Mindfulness A to Z 2022.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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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나면 어떤 기분일까?

나는 이 글을 작성하는 시점에서, 공황장애와 우울증 판정을 받은 지 11개월 차에 들어섰다.

현재 일본에 살고 있으며, 다니던 회사에 휴직서를 내고, 반은 백수처럼 지내며 치료에 전념하고 있으며, 나머지 반은 집안일과 육아를 도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나는 정식적으로 공황장애 판정을 받은 환자로서, 나의 경험담이 다음과 같은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 비망록을 작성하게 되었다.

  • 공황장애를 객관적으로 인식하여, 나의 병세를 잘 컨트롤하도록 스스로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 자신이 공황장애는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기에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해서.
  • '공황장애'라는 증상의 다양성을 지닌 정신질환에 대한, 빅데이터 형성에 일조하고 싶어서.

 

변화가 많은 일상, 하지만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다

2022년 4월 ~ 6월 초

- 요 근래의 많은 변화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최근 3개월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4월에는, 태어난 지 만 10개월이 된 첫 딸아이를 보육원에 보내기 시작했는데, 한 달 동안 등원 시간을 조금씩 늘려가며 보육원의 환경에 적응을 시켰다.

5월부터는, 적응기를 무사히 마치고 본격적으로 풀타임으로 등원을 시킬 수 있게 되었다. 아내도 1년 동안의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끝내고 직장에 복직을 했다.

6월 초에는, 우리 회사 사정 때문에, 회사 사택을 나와서 근처의 다른 임대 맨션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렇게 한 숨 돌릴 틈도 없이 여러 이벤트들이 있었지만, 이사를 끝내고 나서는 평일 낮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이 동네 저 동네 산책을 하는 등,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판정받고 휴직을 한 지, 어느덧 7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치료와 휴직기간이 장기화되는 길목에 서 있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일들을 무사히 정리하고 나니, 개운한 느낌마저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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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11일, 토요일

- 언제나와 다를 바 없는 그런저런 주말

이사를 끝내고 일주일 정도가 지난 토요일 아침.

아내는 평소와 다름없이 빨리 일어나, 청소기와 빨래를 돌리고 딸아이의 아침식사와 환복도 끝내 놓고 주말을 맞이했다. 특별한 예정이 없더라도, 이 루틴만큼은 반드시 지킨다.

이 날도 자신만의 루틴을 다끝고, 잠에서 깨어 거실로 걸어나온 나에게, 오전 중의 일정을 제안했다.

"나 오늘 아카짱 혼포(일본판 아가방)에 가서, 우리 딸아이 꺼 베이비 푸드랑 옷 좀 살 건데, 자기도 가고 싶어?"

 

아내의 이런 질문은, 정확하게는 제안이 아니라, 함께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부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언제나 긍정적으로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이 때의 나는 아직도 수면제에 조금 취해있는 상태여서 쥐어짜내듯이 툭하고 대답을 했다.

"어, 그래, 알았어"

 

그리고, 언제 나갈 예정인지 물어보니, 아내가 보란듯이 말했다.

"난 언제든지 나갈 수 있어"

 

나는 서둘러 간단히 세수만 하고,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는, 10분 정도 후에 나갈 준비를 완료했다.

"자기야, 준비 완료!"

 

그리고 마스크를 차고, 바지 주머니에는 내 아이폰 하나만 달랑 집어넣은 채, 아내 뒤를 졸졸 따라 나갔다.

 

공황발작은 언제나 방심하고 있을 때 찾아온다

우리 가족은 카미오오오카(上大岡)라는 요코하마 최대 규모의 부도심지 인근에 살고 있다.

집에서 이곳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려면, 전철을 타고 한 정거장을 가거나, 좀 빙 둘러가는 순환버스를 타는 방법이 있다. 당연히 전철로 한정거장 가는 게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가기로 한 아카짱 혼포는, 카미오오오카 전철역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집에서도 반대 방향이므로 가기가 애매하다. 하지만 버스를 타고 가면, 좀 둘러가기는 하지만 카미오오오카에 도착하기 몇 정거장 전에 아카짱 혼포 근처에 내릴 수 있다.

그 경로를 알아본 아내가 버스를 타고 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딸아이를 챙겨 집을 나섰고, 집 근처 정류장에 도착해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버스가 도착했다.

우리가 이용하는 케이큐 버스는, 기본적으로 앞부분이 노약자나 임산부, 그리고 유모차를 가지고 타는 보호자들을 위한 우선석이 배열되어 있고, 뒤쪽에는 일반인들을 위한 좌우 4열 좌석으로 배치되어 있다.

버스 안은 비어 있었으므로, 나는 적당히 앞쪽의 우선석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딸아이의 유모차를 좌석 옆에 있는 끈으로 고정시켰다. 

아내는 이후의 정거장에서 차례차례로 노인들이 탑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뒤쪽의 어느 한 자리에 착석했다.

실제 케이큐 버스 내부(참고 사진)
유모차 고정끈이 달린 보호자용 우선석(참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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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버스에 탔을 때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다음 정류장부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버스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4~5정류장 정도 지났을까, 버스 안은 순식간에 수많은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버렸다.

인파로 가득 찬 버스 안
인파로 가득찬 버스 안(참고 사진)

 

여기서부터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버스 안이 사람으로 가득 차자, 공황발작이 일어난 것이다.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권태감과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그리고 목과 어깨 주변 부분에 힘이 쭉 빠지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머릿속은 패닉 상태가 되었다.

혼자서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그냥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눈을 감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잠에 들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은 사정이 달랐다. 버스 안이 사람들로 가득 차자, 유모차에 앉혀 놓았던 딸아이가 이윽고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가늘게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니, 힘들게 몸을 지탱하며 서 있는 노인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어떻게든 아이의 울음소리를 잠재우지 않으면 여러모로 폐를 끼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힘이 빠진 상태에서도, 유모차에 앉아 있던 딸아이를 힘겹게 들어 올려 내 무릎 위에 앉혀 달래기 시작했다. 아이는 좀처럼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아이는 아이대로 울고, 나는 나대로 아이를 달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심지어 나는 버스에서 내려야 할 정확한 목적지 모르고 있었다. 그냥 아내를 뒤따라 나왔을 뿐이었다. 이 버스를 타고 아카짱 혼포에 가본 적도 없었으며, 아내는 저 멀리 뒷자리에 앉아 있었으므로 직접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붐비는 상황에서 아이를 앉은 채로 유모차를 접고 버스에서 내릴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도중에 내리는 것은 포기하고, 종점에 도착해서 사람들이 다 내릴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내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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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어느 한 정류장에서 버스가 멈춰 섰다. 그리고 뒷문 쪽에서 낯익은 목소리의 작은 외침이 들려왔다.

"여기서 내려요~!"

직감적으로 아내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을 할 수도 없었고,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서 버티고 있었다.

이윽고 버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후에, 아내가 인파 속을 헤집고 왔는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내 뒤통수에 대고 이야기를 했다.

"방금 우리 내릴 차례였는데,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자"

나는 아연실색했다.

 

버스는 금세 다음 정류장에 도착을 했고, 아내가 내 자리 옆에 묶인 고정끈을 풀고, 유모차를 접고 들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 어깨를 두드리며 내리자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딸아이를 꽉 붙들고, 뒷 문 쪽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내리자마자 아이를 내려놓고 허리를 펴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버스의 뒷 문을 크게 몇 번 두드렸다.

뒤로 돌아보니 굳게 닫힌 버스 뒷문의 창 너머로, 어떤 할머니가 내 휴대폰을 흔들며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내 휴대폰이 주머니에서 떨어진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버스는 그대로 출발하지 않고, 뒷 문을 열어주었고, 비틀거리며 걸어가서는 내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내가 잠시 동안 멍하게 있는 사이에, 아내는 유모차를 다시 펴고 딸아이를 앉혀 놓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자기, 괜찮아? 

○○○정거장에서 내린다고 버스 안에서 LINE메시지를 보냈는데...

조금 멀어졌지만 천천히 걸어가자"

그 말을 듣고, 내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정말로 LINE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한편, 나는 생각했다.

 

버스 안에서 우리 딸아이가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고,

내가 중간에 안아주고 달래는 모습을 뒷자리에서 분명히 지켜봤을 텐데,

나에게 LINE 메시지 보내 놓고 정말로 문제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 건가?

행여 나를 위해서 메시지를 보내줬다고는 해도,

내가 확인을 했는지의 여부는 「읽음」 표시가 떴는지로 알 수 있었을 텐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아무런 배려도 없이 나를 그냥 내버려 둔 것인가?

어쩜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지?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사이에, 나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가 폭발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가는 동안에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거친 표현을, 아내에게 퍼부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가게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내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기용 의자가 눈에 띄어, 거기에 털썩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 얼굴은 화끈거렸고, 손과 발이 떨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0여분 정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을까.

이대로는 안 될걸 같아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쇼핑몰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혼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는 내 책상 위에 올려둔 항불안제를 한 번에 몇 알이나 집어삼키고, 이부자리에 쓰러져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이나 잠들었던 것 같다.

의식이 깨어났을 때 아내와 딸아이는 이미 집에 돌아와 있었다.

나는 분명히 아침에 있었던 일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는 생각부터 들어, 일단은 아내에게 사과부터 했다.

아내는 뭔가 머뭇거리는 듯했으나, 더 이상의 일은 묻지 않고, "그래, 알았어"라며 형식적으로만 내 사과를 받아 주었다.

그날의 일은 그렇게 넘어갔다.


 

그 일이 있은 며칠 후. 

아내가 밤늦은 시간에 나에게로 와서 그날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들었다.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무서웠고 트라우마가 될 것 같다며, 눈물을 흘리며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은 본래의 내 모습이 아니라, 공황장애가 만들어낸 환상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또한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제야 아내도 내 마음을 조금 이해했는지 나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가장 후회하고 반성했던 부분이 있다.

우선 내가 앓고 있는 병이 어떤 것이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안 좋은지에 대한 증상을, 아내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내가 정신과에 막 다니기 시작할 때, 아내를 동반하여 옆에 앉혀놓고 치료를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후회가 들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이 날의 일이 아내에게 내 마음과 몸 상태가 어떠한지를 자세히 설명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비록 그 계기가 아내에게 트라우마를 가져다 줄 정도로 과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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