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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발병

우울증, 공황장애 판정받은 이야기(일본의 정신과 진료)

by 후니훈 - Mindfulness A to Z 2022.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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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처음 받아보는 정신과 진료 

지난 포스팅에서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의심되는 증상이 발현하여, 정신과 진단을 받으러 가기로 결심한 과정 대해서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보았다. 어쨌거나 운이 좋게 금방 진찰 예약을 잡을 수 있었고, 내 36년의 인생 처음으로 정신과에 진료를 받으러 가게 되었다. 이상하게 긴장도 되었고, 회사에는 어느 정도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암시해 둔 터라, '생각보다 별 일 아니라는 판정을 받고 끝나면 어쩌지?'라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아내가 걱정하지 말라며 다독여주었다. 어쨌든 난 집을 나서서 그렇게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들어서니, 안에서는 마음이 차분해지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병원이라 그런지 내부 인테리어가 깔끔하고 깨끗했다. 안내 데스크에서 나를 맞이해주던 간호사분께 보험증을 제시했다. 일단 첫 방문 시에는 문진표를 작성해야 된다며, 아래의 문진표와 연필 한 자루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개인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이름이 아닌 번호로 호칭하겠다며, 번호표도 하나 받았다. 문진표를 받아 들고 도서실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일반 내과나 외과보다도 훨씬 많은 문진표의 설문에 적잖이 당황했다. 병원 홈페이지에 문진표 포맷을 다운로드할 수 있어서 사전에 작성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전화로 예약했을 때, 첫 방문 시에는 문진표도 작성해야 되니 30분 정도 빨리 오라는 말을 들었으므로, 사전에 별도로 확인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진표를 15~20여분 정도 뚫어져라 쳐다보며, 하나씩 답변을 써내려 나갔다.

첫 진료를 받게 된 멘탈 클리닉의 문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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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처음 받아보는 정신과 진료 

제아무리 문진표가 나에 대해서 상세하게 질문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나의 증상이나 심경 등을 말로 모든 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 발병 상황과 최근의 생활패턴, 요 근래 느끼는 점 등을 아래와 같이 미리 작성하여 간 것이 도움이 되었다. 20분 정도 문진표를 작성한 후, 내가 가져간 자료를 함께 카운터 간호사에게 전달했다.

첫 진료시에 직접 작성해서 지참해갔던 서류 본문

 

첫 진료 시에 지참했던 본문 내용

■ 증상이 발병 일어났을 때의 상황

지난 주말 토요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문득 회사 업무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가슴의 맥박이 급격히 빨라졌다. 나의 목과 귀 뒷부분에서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고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대로는 질식사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제대로 내 몸을 컨트롤할 수 없는 패닉 상태에 빠졌고 손과 발에서 미약하게 경련도 일어났던 것 같다. 나는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공포에 휩싸였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다. 시간이 조금 흘러서야 몸의 맥박이 조금 안정이 되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에 좀처럼 잠에 들지 못했다.


■ 최근 1~2개월간의 생활 패턴

회사에는 매일 아침 정시보다 1~2시간 빨리 출근해서, 밤 9시~10가 넘는 시간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아 신체적・정신적으로 상당히 부담이 크고 항상 지쳐있다.

주어진 일이 너무 많아, 하나라도 일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로 집에 돌아온다. 그리고 잘 때까지 하던 일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직장에서는 중견사원으로서 연구・개발에서부터 프로젝트의 기획・검토・조정 등을 망라한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또한, 업무내용상 실험도 직접 해야 하는데, 그 실험 내용들은 공사현장에서나 할 법한 중노동이 동반되는 작업들이다. 요 근래 시간적・물리적・인적으로 제약이 많이 있는 가운데, 뭐 하나 제대로 끝낼 수 있을 거라는 기약이 없는(자신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어왔다.


■ 요 근래 생각하고 있는 것, 느끼고 있는 것 들

・ 업무가 좀처럼 진행되질 않는다.

・ 자꾸 마음만 앞서서 조바심이 나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 불안한 마음에 안절부절못하지 못한다.

・ 머릿속 생각이 도무지 정리되질 않는다.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어, 이 상태로라면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자꾸 잊어버린다. 찾는데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많다(매일 3~4번 이상은 잊어버린다).

・ 제대로 잘 수가 없다. 집에 오면 몸이 너무 피곤해서 일단 잠에 들지만, 새벽 2~3시경에 항상 눈이 뜬다. 대게는 다시 잠들지 못한 채로 누운 상태로 아침을 맞이한다.

・ 일 이외의 시간에는 우울한 기분 때문에 의욕이 생기질 않고, 관심조차 가지 않는다.

・ 집에서는 나도 모르게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이상한 소리는 내는 경우가 있다. 샤워 중에 무언가 뇌리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주먹으로 벽을 때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아내에게 주의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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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찰 결과,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이것저것 다 쓰고 제출하고 나서, 초조하게 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라인이 왔다. 그걸 읽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내 번호가 호출되었다. 나는 진료실 앞서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내의 한마디가 정신적으로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과 정신적인 상태를 최대한 일목요연하면서도 장황하게(?) 설명해 나갔다. 의사는 내가 하는 이야기를 하나도 빠지지 않고 키보드에 타자를 치며 기록해 나가는 듯 보였다. 그리고 수면 상태와 식욕, 전반적인 몸 상태 등, 몇 가지에 대해 상세히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의사는 '흠..' 하고는 서랍에서 파일을 하나 꺼내 들고, 다음과 같은 그래프를 보여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심각한 우울증 급성기 

그래프의 세로축이 병상의 정도를 나타내고, 가로축이 치료 기간이다. 이는 우울증의 일반적인 치료모델을 나타내는 것인데, 선생님은 그래프 곡선 제일 왼쪽 골짜기 부근을 가리키며, 내 상태가 거기쯤에 있는 걸로 보인다고 이야기를 했다. 우선 내가 한 이야기만 들어봤을 때는, 상태가 굉장히 좋지 않으므로, 내일 당장이라도 재택 요양과 약물치료를 병행할 필요가 있다며, 심지어, 혹시라도 극단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정도라면 당장 입원 가능한 병원도 소개해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좀 당황해서 '입원까지는...'이라며 말을 얼버부렸지만,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다고 하니, 이대로 방치해 두었던 나 자신에게 미안한 마음부터 들었다.

우울증 치료 모델 (사진출처 : 하트 클리닉 케어 가족교실)

 

심지어 공황장애까지 앓고 있었다 

또한, 내 증상은 우울증 뿐만이 아니었다. 특정한 상황에서 공황발작도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공황장애도 앓고 있다는 소견을 이야기했다. 나중에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알았지만,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아래와 같은, 13가지 의심 증상 중에 4가지 이상의 증상이 나타난다면 공황장애로 판단한다고 한다(아마도 세계 어디를 가도 같은 판정기준을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사는 내가 이 중에서 6~7가지의 증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의심된다고 이야기했다.

한국과 동일한 일본의 공황장애(パニック障害) 판정 기준

■ 일본의 공황장애(パニック障害) 판정 기준;한국과 동일함

• 두근거림, 심장이 마구 뛰거나 맥박이 빨라지는 느낌
• 땀이 남
• 손발이나 몸이 떨림
• 숨이 가빠지거나 막힐 듯한 느낌
• 질식할 것 같은 느낌
• 가슴 부위의 통증이나 불쾌감
• 메슥거리거나 속이 불편함
• 어지럽고 휘청거리거나 혹은 실신할 것만 같은 느낌
• 비현실감, 혹은 이인감(세상이 달라진 것 같은 이상한 느낌, 혹은 자신이 달라진 듯한 느낌)
• 자제력을 잃거나 미쳐 버릴 것만 같아서 공포스러움
• 죽음에 대한 공포
• 이상한 감각(손발이 저릿저릿하거나 마비되는 것 같은 느낌)
• 오한이나 몸이 화끈거리는 느낌

이상의 증상 중, 4가지 이상의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면 공황장애 판정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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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진단서 끊어 줄 테니, 내일부터 당장 쉬는 게 어때요?" 

의사는 우울증과 공황장애 증상으로 당장 내일 일자로 2달분의 진단서를 끊어주겠다고 했다(이유는 모르겠지만 3달치 진단서를 갑작스레 회사에 가져가면 당혹스러워한다는 이유로 일단은 2달치를 써준다고 했다). 그리고 치료는, 사람마다 다르고, 경과에 따라서도 거기에 맞는 처방이 필요하니 단정할 수는 없으나, 나의 경우에는 최소 6개월에서 1년 이상의 치료가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물론 직장에 복귀하는 것도, 경과를 봐가면서 소견서를 작성해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당분간은 주 1회의 통원치료를 해 나가자고 이야기한다. 의사의 이야기를 듣던 도중에 멍하니 진료실 구석을 바라보았다.

병원 진단서(우울증-うつ病, 공황장애-パニック障害)

■ 처방받은 진단서 본문 내용

병명: 우울증, 공황장애

 상기 질환에 의해 당원에 통원 중.
 억울한 기분, 피로감, 집중력 저하, 수면 장애, 식욕 저하, 공황 발작, 불안감을 인정하고, 2021년 ○○월 △△일부터 2022년 ●●월 ▲▲일까지 휴직과 재택 요양을 필요로 함.

 이하 여백


진단서와 처방전을 받고 나는 병원 밖으로 나와 근처에 있는 공원 벤치에 앉아 한참을 초점 흐린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어찌 댔건, 닳을 대로 닳은 내 마음을 내려놓고 돌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회사에 전화를 했다. 아무리 진단서를 받았다 하더라도, 내일부터 당장 하던 일도 그만두고 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의 인수인계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 상사는, 자신도 안타깝다며 몸 관리를 잘하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인수인계 같은 것도 필요 없으니 바로 내일부터 쉬고,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가는 게 좋은지 관리부에 이야기해보고 다시 연락해주겠다고 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일 때문이라 생각했으면서도, 당장에 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준 회사 측에 한편으로는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잠시 쉬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돌아보면 그 쉼표가 생각보다 길어졌지만 말이다.

 

일본 생활 중에 마음고생했던 이야기는 아래 포스트 참조

 

우울증, 공황장애 경험담(feat.일본생활)

 과거를 돌이켜보니, 나는 완전한 일의 노예가 되어있었다 우선, 짧게나마 내가 지나온 과거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는 일본의 한 제조업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외노자'다. 2012년에 대학원

the-man-of-illusion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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