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돌이켜보니, 나는 완전한 일의 노예가 되어있었다
우선, 짧게나마 내가 지나온 과거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는 일본의 한 제조업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외노자'다. 2012년에 대학원 진학 때문에 일본 오사카로 왔고, 석사과정 수료 후에 일본에 그대로 남아서 도쿄・요코하마를 주 거점으로 하는 글로벌 대기업의 취직에 성공했다. 하지만 취업 자체는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회사 업종 자체가 내가 공부해 왔던 전공과는 거리가 먼 회사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취업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일본에서 인생 첫 취업을 하게 되었고, 심지어 전공분야도 다른 부문의 연구・개발 부서에 발령이 났으니 앞이 깜깜했다. 어떻게 보면 그저 대기업의 간판만 보고 입사한 셈이었다. 그래도 부족한 전문성을 커버해 보려고, 첫 몇 년간은 이것저것 시키는 거 다 해가며 버터내고 조금씩 배워나갔다.
취업 후 어느덧 8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나는 중견 사원이 되었다. 그리고 내 나이도 3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이상하게도 다른 부문으로의 이동이나 로테이션 한번 없이, 같은 부서에서 계속 일을 했다. 또한 나는 다른 사람들 보다도 훨씬 더 많은 종류의 일을 처리해낼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 같은, 나쁘게 말하면 굴리기 좋은 사원이 되어있었다. 연구・개발 업무의 특성상 연구 아이템을 스스로 제안해서 윗선에서 예산을 받아 진행해 나가야 하는 업무와, 다른 사업부 등에서 의뢰가 들어온 다수의 '골치 아픈' 트러블을 내가 메인 담당자가 되어서 처리하는 중이라, 몸이 열개라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노예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일은 이야기는 그렇다 치고, 나는 2019년에 지금의 일본인 아내와 결혼을 했는데, 2021년에 딸아이가 막 태어난 참이었다. 아내는 출산휴가와 육아휴가를 받아서 쉬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아이를 보살펴줄 수 있는 여건은 되었으나, 아무리 육아휴직 중이라도 혼자서 아이를 돌보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자는 시간 빼고 거의 회사에 살다시피 했으니, 아내는 나에게 힘든 내색을 표하지도 못하고 독박 육아를 뒤집어씌고 있던 중이었다. 나의 생활은 워라벨 따위는 꿈 도꿀 수 없던 상태였고, 어떻게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명분 하나로 아내에게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몸이 나에게 이상 신호를 보내왔다
그러다 지난 2021년 11월 늦가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주말, 나는 온종일 일 걱정을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일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집안일을 하고, 아이 기저귀도 갈아주고, 때로는 한국에 부모님에게 영상통화로 손녀 구경을 시켜주는 와중에도, 마음 한구석은 일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그런 식으로 주말을 보낸 건 벌써 2~3년이나 넘은 것 같다(와이프가 임신 중이었을 때도 포함해서 말이다).
토요일 저녁에 아내와 아이가 잠든 모습을 보고,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부자리에 누웠다. 물론 그때도 나는 일 걱정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일들을 껴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뭐하나 제대로 진행되는 게 없었다. 연도말로 진입하니 사업부로부터 시급하게 들어온 뒤늦은 의뢰도 점점 늘어났다. 지금 당장 재택근무용 노트북을 켜고, 회사 네트워크 망에 몰래 접속해서, 잠도 안 자고 일해도 모자랄 정도였다(우리 회사는 회사 네트워크에 언제 접속했는지 일일이 체크하지 않는다. 혹은 그런 여건이 갖추어져있지 않다. 이게 디지털 시대의 일본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누워있으니 너무나도 답답했다. 이 많은 일들을 도무지 당해낼 제간이 없었다. 물론 상사도 내 사정은 알고 있었다. 허나 상사도 너무나도 바빠서 하나라도 제대로 이야기할 시간조차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처지를 알고, 언제나처럼 '그래도 할 수밖에 없잖아'라는, 언젠가 상사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적이 있는 공허한 대답이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누워서 몇 번이고 뒤척이다 이대로 고통 없이 가루가 되어 증발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죽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행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쳐도, 먹고살려야 할 가족이 생겼으니 그럴 권리조차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영화의 CG처럼, 내 몸이 가루가 되어, 뿌연 연기처럼 공기 중으로 스윽하고 흩어졌다가 뭐라도 진정되면, 다시 내 몸이 재생되었으면 좋겠다는 망상뿐이었다.
그러다가 자려던 차에 어느 순간, 나는 지금까지 느껴본 적이 없는 숨 막힘과 발작을 경험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떠한 생각이 트리거가 되어, 심장이 떨리고, 숨도 막히고, 손발을 제대로 컨트롤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 5~10분 정도 지속되었던 것 같다. 잠시 후 몸의 이상이 수그러들었고, 그 이후에도 불안감을 느껴 새벽 3~4시가 넘도록 잠들지 못했다. 이건 뭔가 내 몸이 나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일하고 스트레스를 달고 사는 거야 우리들 인생이 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내 몸이 신호를 보내왔으니까 말이다. 뭔가 결단을 내려야 될 것 같았다. 일단 자고 있던 아내를 깨워 뜬금없이 월요일에 회사를 쉬겠다고 선언했다. 왜냐하면 당장 병원부터 찾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잠시 멈춰 서자'
그날 저녁, 나에게 일어났던 발작과 같던 증상은 직감적으로 정신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요일 늦은 아침에 일어나서 마누라에게 다시 한번 지난밤에 일어났던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내도 내가 겪고 있을 정신적인 부담과 스트레스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 주는 편이었기에,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알아봐 주었다. 증상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정신과 쪽으로 한번 상담을 받아보는 게 좋지 않겠냐라는 결론이 났다. 한국도 그렇겠지만 일본도 일요일은 응급 병실이나 특수한 병동을 제외한 대부분의 개인병원은 휴무이기 때문에, 오늘은 일단 이것저것 밑조사를 하고, 월요일 아침부터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보기로 했다.
다음날 월요일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회사에 전화를 해서 몸이 안 좋으니 급히 하루 쉬겠다고 전화를 했다. 그리고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는 어제께 알아봐 두었던 개인 정신과 병원과 멘탈 클리닉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어림짐작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10군데 가까이 전화를 했는데도 바로 당일에 진료 예약이 가능한 곳이 없었다. 구글 검색에서 평가가 좋은 병원은 초진의 경우, 아무리 빨라도 1개월 정도는 기다려야 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조금 절망스러웠다. 나는 당장 진료를 받고 싶은데, 정신과가 이렇게 붐빌 줄은 몰랐다.
여러 군데 전화를 돌리고 있는 사이, 내 마음은 점점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당장 병원에서 상담을 받고, 어떻게든 쉼표를 찍고 가야겠다'는 결단이 섰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더욱더 조바심이 났다.
"간절합니다. 꼭 좀 진찰해 주세요"
이번에는 집에서의 거리는 포기하고 좀 더 지역을 넓혀서 병원을 다시 찾아보았다. 그리고 오늘 말고도 내일이라도 좋으니, 조건을 조금만 더 완화시켜, 추가로 몇 군데 후보를 찾아놓고 리스트에 올렸다. 그리고 오후에 다시 전화를 돌렸다.
"저기, 지금 당장 진료가 필요해서 그런데, 오늘 당장 혹은 내일이라도 좋으니 진찰을 받을 수 없을까요?"
그렇게 다시 몇 군데 알아보던 중에 유일하게 한 병원에서 빈 시간대가 있다고 대답해 주었다.
"내일 화요일 오후 6시에 늦은 시간이라도 괜찮으시면, 비어있는데 예약 잡아드릴까요?"
나는 너무 간절했다.
"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장 진찰이 필요합니다"
운이 좋게도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병원이라서 비어있었던 것이다. 아직 구글 검색에 달린 코멘트의 수는 적었지만, 그래도 평점이 좋았다. 그리고 담당의사가 일일이 각 코멘트에 대해서 친절히 답변도 달아주고 있었다. 나는 이제서야 조금 한 숨을 놓을 수 있었다.
'마음이 멈추라고 하는데, 차마...'
병원에 가서 내가 어떤 진단을 받을지는 알 수 없었다. 인생에서, 그것도 외국에서, 처음으로 정신질환 때문에 병원에 가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 마음은 어느 순간부터 외치고 있었다. 이 상태를 지속할 수 없음을 말이다.
나는 회사에 전화해서 내일 또 쉬겠다고 그랬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 내 몸에 일어났던 일, 그리고 내일 정신과에 가서 진단을 받게 될 일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했다. 내 상사는 굉장히 놀란 듯 걱정스럽게 괜찮냐고 물어봐주었다. 내 마음은 'STOP!'을 외치고 있었지만,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다. 일단 병원에 가서 어떤 진단을 받는지 확인한 후에 제대로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의 정신과 진료는 어땠는지에 관해서는 다음 포스팅에서 이야기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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